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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내 사랑 - 안도현 화암사, 내 사랑 안도현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추석 무렵 - 김남주 추석 무렵 ​ 김남주 ​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 ​ ☆ 김남주 (1946 ~ 1994) ​ 전라남도 해남 출생. 광주일고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수학하였다.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1977년 황석영(黃晳暎)·정광훈·홍..
추석 무렵 - 맹문재 추석 무렵 ​ 맹문재 ​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 맛처럼 담백했다 잘 익은 호박 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 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 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 ​ ​ ☆ 맹문재 (1965 ~ ) ​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활발히 하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
진달래꽃 - 김소월 진달래꽃 ​ 김소월 ​ ​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꽃을 사뿐히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리우리다 ​ ​ ​ ​ ☆ 김소월 (1902∼1934) ​ 개설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 생애 및 활동사항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
몾 잊어 - 김소월 몾 잊어 ​ 김소월 ​ ​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 그러나 또 한끝 이렇지요, 그리워 살틀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 ​ ​ ​ ​ ☆ 김소월 (1902∼1934) 개설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 생애 및 활동사항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
열애 - 신달자 열애 신달자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 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잘 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벤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가겠다 피 흘리는 사랑도 며칠은 잘 나가겠다 내 몸에 그런 흉터 많아 상처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려 고질병 류머티스 손가락 통증도 심해 오늘밤 그 통증과 엎치락뒤치락 뒹굴겠다 연인 몫을 하겠다 입술 꼭꼭 물어뜯어 내 사랑의 입 툭 터지고 허물어져 누가 봐도 나 열애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작살나겠다. ○ 신달 (1943 ~ ) 1943년 12월 25일 경남 거창 태생.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
'대학로 공연관광 페스티벌(웰컴대학로)', 혜화동 대학로 한국관광공사는 ‘2019 대학로 공연관광 페스티벌(이하 웰컴대학로)’을 9월 2일에서 10월 27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 '웰컴대학로' ​ 9월 2일 ~ 10월 27일 ​ 대학로 일대 아시아 유일의 공연관광 축제 웰컴대학로는 대학로를 ‘한국의 브로드웨이’로 전세계에 알리고, 공연을 한국의 매력적인 관광 콘텐츠로 소개하기 위해 2017년부터 매년 가을 대학로에서 개최되는 아시아 유일의 공연관광 축제​이다. 올해는 역대 최대 70개 공연들이 참여하여, 개막식, 웰컴씨어터 릴레이쇼, 외국인 특별공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Great show in Daehakro’를 테마로 열리는 개막식에서는 웰컴대학로 참가작들이 밴드 콘서트, 솔로, 듀엣 등 다양한 쇼의 형식으로 관객들과 만난다. 대학로 인기..
가을 엽서 - 안도현 가을 엽서 ​ 안도현 ​ ​ ​ 한 잎 두 잎 나뭇잎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 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 싶습니다 ​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 ​ ☆ 안도현 (1961 ~ ) ​ 1961년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동에서 아버지 안오성과 어머니 임홍교의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대구 아양국민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문예반 '태동기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홍승우·서정윤·박덕규·권태현·하응백·이정하 등의 선후배들을 알게 되었고, '학원문학상' 등 전국의 각종 백일장과 문예 현상공모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