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본명은 황재우(黃在祐). 서울대 미학과 및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같은 해 『문학과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3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기호‧만화‧사진‧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화엄사상(華嚴思想)과 마르크스주의를 기저에 둔 『나는 너다』(1987), 현실과 초월 사이의 갈등을 노래하며 그 갈등을 뛰어넘는 화엄의 세계를 지향한 『게 눈 속의 연꽃』(1991), 동시대인의 객관적인 삶의 이미지와 시인의 개별적인 삶의 이미지가 독특하게 겹쳐져 생의 회한을 담고 있는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1998) 등을 간행하였다.
황지우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기법을 통해 풍자와 부정의 정신 및 그 속에 포함된 슬픔을 드러내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대를 풍자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그의 시에는 정치성‧종교성‧일상성이 고루 배어들어 있다.
출처: 황지우 [黃芝雨]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인기 #가방 #황지우 #늙어가는아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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